본문 바로가기
우리가여기에있다!/사라진 장소

예산 덕산면 육괴정(六槐亭) 1993

by mooksu 2012. 8. 21.

예산 덕산면 수덕고개 육괴정(六槐亭)의 어제와 오늘 


예산군 덕산면 둔리와 홍성군 갈산면 사천리간 40번국도의 고개마루. 마을사람들은 수덕고개라고 부른다. 

'육괴정'이란 조선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로 인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했다는 정자라고 한다. '육괴정'이란 이름은 당대의 명현인 모재 김안국을 비롯 규정 강은, 계산 오경, 퇴유 임내신, 두문 성담령, 남당 엄용순 등 6명의 선비가 모여 사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는 뜻에서 정자 아래에 못을 파서 연을 심고 각자 한그루씩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내포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이곳을 거쳐야만 했는데 바로 이곳에 주막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막에서 쉬어가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식당과 여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인용: cafe.daum.net/sansara, 산삼과 약초사람들 블로그에서..)



현존하는 옛 건축물에서 그 아름다움, 완성도, 창건연대 등을 고려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건축물은 '수덕사 대웅전'이다. 우리나라 옛 건축의 향기를 배우려는 건축학도들에게는 필수코스요, 경외의 대상이다. 예전에 이 수덕사를 가기위해서는 수덕고개를 거쳐야만 되었는 데, 이 수덕고개에는 육괴정이라는 느티나무군락이 자리잡고 있다.  1993년 여름인가에 수덕사를 답사하면서 수덕사 대웅전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곳은, 바로 이 곳, '육괴정(六槐亭)'이었다. 거의 300여년에 가까운 6그루의 느티나무와 그 밑에 초라하게 허물어져 가듯 기대어 있는 조그마한 이 민가에 대한 인상은 희미한 안개속에 사라져가는 시간의 흔적의 끝무리를 보는 듯 하였으며, 동시에 근대화의 물결속에 사라져가는 우리나라 민가의 소박함의 마지막 유산 중의 하나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1995년 경인가에 다시 수덕사 대웅전을 보러 가던 길에, 육괴정밑의 이 소박한 민가가 사라진 걸 보게되었다. 덜렁 2층짜리 음식점이 길게 들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냥 마음이 아팠다.  그냥 부수어져 사라진 것이 아팠다. 건물도 생명을 다하게 되면 사라지는 것뿐인데, 그리고 건물이 너무 낡았으니 죽을 때가 된 것도 알았는 데도 그냥 마음이 쓰리고 애렸다. 사랑했던 연인을 사랑하면서도 떠나보내야 하고, 평생을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걸 알면서 살아가야 되는 사람의 마음처럼, 마음이 애렸다.  '토지주'의 생계를 위한 당위성에 대한 옹호, 얼마든지 리노베이션하여 덕산면의 또다른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논리 등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대부분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은, 우리나라의 '민가'에 담긴 정서(집을 바라보고, 집을 대하는 태도)를 시간의 강물에 떠내어 보내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건축가이지만, 아직도 우리 옛 건축에 남아있는 그 담백함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 서정성을 흠모하고 있다. 아마 많은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에 침묵으로 공감하고 있을 께다.




민가의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은 사실 만국공통이다.  거주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지어지기에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삶과 함께 드러난다.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낼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더 잘 사는 모습을 과시하려 지어지는 것도 아니다. 거주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와 목적으로 지어지는 '구축물(대상)'이 아니기에, 그냥 오랜동안 그 땅에서 그 환경과 처지, 구축방식에 맞게 지어지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존재하기=거주하기'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가'는 어떤 건축물보다도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소위 '빈자의 미학' 자체인 것이다. 항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건축물을 주체의 표현대상이거나 창작물, 나아가 남하고 차별화될 수 있는 미적대상으로 바라보는 습성을 가진 건축가에게는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을 드러내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드러낼 수 없는 차원이며, 한편으로 이 시대의 흐름은 새롭거나, 다르거나 한 것에 주목하고, 동시에 대부분 시각적으로 매우 자극적인 이미지로 어필하고 있는 처지에 있기에, 그러한 내면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건축가들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건축가들은 이런 '건축가없는 건축'을 한편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다.

댓글